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데드풀과 울버린 시리즈를 워낙 좋아해서 극장에서 바로 보려 했는데, 관객 평점이 생각보다 낮게 나오는 걸 보고 결국 넷플릭스로 집에서 봤습니다. 로튼 토마토 79%, 메타크리틱 54점. 전작인 데드풀 1편(85%), 2편(84%)과 비교하면 확실히 한 단계 내려온 수치입니다. 과연 "마블 지저스"를 자처한 이 영화, 기대만큼이었을까요.

팬서비스로 가득 찬 크로스오버 쇼
일반적으로 마블 영화라 하면 탄탄한 내러티브와 캐릭터 성장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봐보니, 이 영화는 그쪽보다는 완전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두 인기 캐릭터의 크로스오버 이벤트 쇼에 훨씬 가깝습니다.
크로스오버(Crossover)란 원래 서로 다른 세계관이나 프랜차이즈의 캐릭터들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나는 방식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폭스의 엑스맨 유니버스 소속이었던 울버린이 마블 MCU의 데드풀과 함께 등장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애플과 닌텐도가 합병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그런 종류의 흥미로움이죠.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오래 따라온 팬으로서, 반가운 얼굴들이 등장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반응이 나왔습니다. 특히 보이드에서 등장하는 카메오들은 결코 스토리의 중심은 아니지만, 극장이었다면 뒷자리에서 탄성이 터졌을 장면들이었습니다. 이스터에그를 찾는 재미도 꽤 쏠쏠했고, 폭스 마블 시리즈를 추억하는 팬들에게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선물이 되는 영화입니다.
다만 이 팬서비스가 영화의 중심이 되다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드라마적 무게감은 사실상 소멸에 가깝습니다. 내러티브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보다는 이 캐릭터 저 캐릭터가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패턴이 반복됩니다. 알고 보면 더 재밌고, 모르면 그냥 산만한 영화입니다.
카메오와 멀티버스, 아는 만큼 보인다
이 영화를 가장 불편하게 본 순간이 있었다면, 마블 TV 시리즈를 안 봤더라면 꽤 당황스러웠겠다 싶은 지점들이었습니다. 특히 TVA(Time Variance Authority)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는데, TVA란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로키'에서 처음 등장한 기관으로 시간의 흐름과 멀티버스를 관리·통제하는 조직입니다. 이 개념을 모르면 빌런 미스터 패러독스의 행동 동기가 잘 납득이 안 될 수 있습니다.
멀티버스(Multiverse)란 우리가 사는 세계선 외에도 무수히 많은 평행 세계가 존재한다는 개념입니다. 마블은 페이즈 4 이후 이 설정을 핵심 축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기존 데드풀 시리즈만 보고 왔다면 이 배경 지식 없이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제법 버거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도 보다가 "이게 로키에서 나온 그 설정이구나" 싶은 순간에야 흐름이 정리됐습니다.
카메오 등장은 분명히 영화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카메오는 깜짝 등장으로 효과를 내는데, 이미 많은 정보가 사전에 유출된 탓인지 제가 봤을 때는 반전의 여운이 조금 약했습니다. 그래도 등장 자체가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더군요. 특히 엑스맨 유니버스 관련 카메오들은 단순 등장에 그치지 않고 짤막하게나마 그 캐릭터다운 순간을 주려는 시도가 보였습니다.
로튼 토마토 기준으로 비평가 점수(79%)와 관객 점수의 온도 차가 있는 편인데(출처: Rotten Tomatoes), 이 차이는 아마 배경 지식 유무에서 상당 부분 갈린다고 봅니다. 팬에게는 충분히 즐거운 영화, 일반 관객에게는 다소 산만한 영화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TVA와 멀티버스 개념은 디즈니플러스 '로키' 시청 후 보면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 카메오는 엑스맨 프랜차이즈 팬일수록 반응이 강하게 나옵니다
- 마블 세계관을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는 스토리 파악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 이스터에그는 폭스 마블 시리즈 전반에 걸쳐 여러 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R등급 액션, 기대와 현실의 온도 차
R등급 액션이라 하면 흔히 수위 높고 타격감 강한 장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제로 이 영화는 R등급(미국 기준 17세 미만 보호자 동반 관람가, 국내 기준 청소년 관람불가에 해당)답게 피, 살점, 뼈가 난무하는 고어한 장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데드풀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하죠.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고어의 수위는 높아졌지만, 혈액이나 신체 파손에 CG가 과하게 쓰인 탓에 실제 타격감보다는 게임 화면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꽤 있었습니다. 특히 다수의 캐릭터가 뒤섞이는 스플래시 시퀀스를 수평 롱테이크로 잡는 연출 방식은 오히려 느슨함을 더 부각시켰습니다.
감독 숀 레비는 '프리 가이', '박물관이 살아있다' 시리즈처럼 낙천적이고 허구적인 연출에 강한 감독입니다. 유머 감각은 이 영화에서도 잘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액션 시퀀스에 대한 이해도는 데드풀 1, 2편 대비 아쉬운 지점이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벤져스 시리즈의 밀도 있는 액션 연출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반면 휴 잭맨의 울버린은 확실히 존재감이 달랐습니다. 데드풀의 쉴 새 없는 농담 속에서도 울버린의 무게감과 묵직함은 살아있었고, 슈퍼히어로 영화사에서 휴 잭맨이 얼마나 소중한 배우인지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R등급 액션의 강화는 분명 이 영화의 강점이지만, CG 완성도와 연출 방향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완성도, 진짜 마블 지저스가 맞나
이 영화는 스스로 '마블 지저스', 즉 마블 프랜차이즈의 구세주를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란 마블 스튜디오가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구축해온 공유 세계관 프랜차이즈로, 페이즈 4 이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는 평가가 많습니다(출처: Metacritic).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이게 구세주 맞아?"였습니다. 혁신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거의 모든 요소를 과거에 의존하고 있었거든요. 카메오는 과거 캐릭터들이고, 개그는 폭스 매각이라는 케케묵은 소재를 반복하고, 쿠키 영상조차 새로운 방향보다는 영화 내 농담의 후속 정도에 그칩니다. 나사를 같은 방향으로 계속 조이면 더 빼기 어려워지듯, 이 영화도 마찬가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데드풀 특유의 제4의 벽 파괴(fourth wall break) 개그도 이제는 익숙해진 공식이 됐습니다. 제4의 벽 파괴란 캐릭터가 자신이 영화 속 존재임을 알고 관객이나 현실 세계를 직접 언급하는 연출 기법입니다. 1편에서 이 기법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진부해지는 건 저도 어쩔 수 없이 느꼈습니다. 보다가 살짝 졸릴 정도로 지루한 순간도 있었고요.
번역도 아쉬운 지점이 있었습니다. 긴 욕설을 직역하다 보니 뉘앙스가 잘 살지 않았고, 일부 시의성을 노린 표현들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완성도보다는 이벤트성에 방점이 찍힌 영화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데드풀과 울버린, 엑스맨이나 MCU를 모르면 재미없나요?
A. 일반적으로 마블 영화는 어느 정도 예비 지식 없이도 즐길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특히 TVA와 멀티버스 설정은 디즈니플러스 '로키'를 보지 않으면 맥락이 잘 잡히지 않고, 카메오들도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모르면 그냥 낯선 얼굴로 지나칩니다. 기존 팬 대상의 팬서비스 영화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Q. 데드풀과 울버린 잔인한 장면이 얼마나 심한가요?
A. R등급답게 고어한 장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피와 살점이 직접적으로 묘사되며, 특히 TVA 요원들을 상대하는 액션에서 수위가 높습니다. 다만 혈액 표현에 CG를 많이 사용한 탓에 사실적인 공포감보다는 과장된 코미디 느낌에 가깝습니다. 잔인한 장면에 예민한 분들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Q. 데드풀 1, 2편을 안 봐도 이 영화 볼 수 있나요?
A. 전작을 보지 않아도 기본 줄거리 파악은 가능하지만, 영화 초반부터 데드풀의 과거와 어벤져스 지원 실패 등 전작의 맥락을 전제로 진행됩니다. 개그의 상당 부분도 전작 및 폭스 마블 역사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1편과 2편을 먼저 보고 오는 것을 권장합니다.
Q. 로건을 보고 가야 하나요?
A. 필수는 아니지만 보고 가면 훨씬 더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 '로건'에서 울버린이 맞이한 마침표를 의식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로건에서 울버린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으면 이 영화에서 그 캐릭터를 다시 데려오는 맥락이 훨씬 자연스럽게 와 닿습니다.
결론
데드풀과 울버린은 명절에 딱 한 번 얼굴을 볼 수 있는 재밌는 막내 삼촌 같은 영화입니다. 그 자리에서는 분명 즐겁고 반갑지만, 돌아서면 "그래서 뭐가 달라졌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저처럼 극장 대신 넷플릭스로 봤다면 아쉬움이 덜하겠지만, 이 영화는 분명 팬이라면 극장 경험이 더 어울리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데드풀 시리즈 팬, 엑스맨 팬, R등급 블랙코미디를 좋아하는 분들께는 충분히 티켓값이 아깝지 않습니다. 반면 완성도 있는 한 편의 영화를 기대하거나, MCU 세계관을 처음 접하는 분들께는 다소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마블의 구세주이기보다는, 오랜 팬들을 위한 애정 어린 이벤트 영화로 자리매김한 작품입니다.